진짜 김구 유적지 따로 있었다
[특별취재]임정90주년 <승리의 역사를 가다>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우한ㆍ창사ㆍ치장=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2-27 면번호 : 1면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0902260116
중국 내 항일운동 유적지 일부가 엉뚱한 곳으로 조사됐다는 문제제기가 끊이질 않아 철저한 고증이 요구된다. 이는 조사과정에서 생존 독립운동가의 증언과 현지주민의 확인을 통해서 손쉽게 드러날 사실조차도 제대로 실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으로 중대한 역사적 오류가 빚었질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본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수립 90주년을 맞아 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과 공동으로 상하이(上海) 등 중국내 21개 도시에 산재된 항일유적에 대한 조사를 벌여 이같은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관련기사는‘임정 승리의 길을 가다’란 제목으로 다음달 6일부터 매주 1회씩 17회 연속 보도된다.
조사 결과 일부 엉뚱한 자리가 항일유적으로 소개되거나 문제제기된 유적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질 않고 있었다. 일부 조사보고서는 오ㆍ탈자와 주요위치도 틀린 허술한 약도로 일반인은 사용자체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본보 조사에서 드러난 조사오류지는 우한(武漢)시 조선민족전선연맹. 우한시 성리지에(勝利街) 15호 조선민족전선연맹에 대해 현지 주민들은“한국정부가 위치조사를 잘못돼 23호를 엉뚱하게 15호로 소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리지에는 거리를 따라 한편은 홀수지번이, 반대편에는 짝수지번이 순서대로 늘어서 이전 조사에서 15호로 조사한 자리는 현재 23호 지번 패찰을 부착하고 있었다.
반면 인근 창고건물은 지번이 부착되지 않았지만 인근 주민들은“예전부터 15호가 분명하다”고 확인해 줬다. 주민 쉬(徐.53)씨는“성리지에 15호는 현재 1층에 창고가 있는 건물의 일부분이 맞다”며“홀수과 짝수지번 거리가 일정거리(약 5m)를 두고 지번이 커지기 때문에 23호 자리에 15호가 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위치했던 우한(武漢) 성리지에(勝利街) 15호는 현재 창고로 사용되는 흰색 3층건물<오른쪽>로 현지주민들은 확인하고 있지만 정부는 23호 <왼쪽 사진>를 잘못 조사해 공개하고 있다.
김구의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한 창사(長沙)시 난무팅(楠木廳) 역시 기존 4호는 위치조사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창사시로부터 제기됐다.
창사시는 최근 남목청에 대한 유적보존공사에 착수했는데 기술책임자 완(万.53)씨는“당시 조선혁명당 본부는 현재 난무팅 6호로 2층에서 옆건물과 연결돼 한국정부가 주장하는 4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지금은 사라졌지만 옆건물서 김구피격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복원위치에 대해“1950∼1960년대 문패를 정리하고 몇 번의 변화를 거친 뒤 2호였다가 1990년대 4호에 이어 현재의 6호가 됐다”며“지난해 5∼6월 복원작업이 결정됐고 서류 및 현지주민 고증을 거쳐 1차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이어 피격장소에 대한 2차 복원공사가 계획 중”이라고 밝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정부가 엉뚱한 곳을 김구선생 관련 유적지로 관리해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치장 임정청사 역시 조사가 잘못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치장은 1939년 4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곳으로 국가보훈처는 청사위치를 상성(上升)가 27호로 조사했지만 생존 독립운동가와 관련단체들은“한마디로 말도 안된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임시정부를 구성하던 3당대표는 1938년난무팅(楠木廳) 조선혁명당본부에 서 통합문의를 논의하던 중 저격을 당해 김구는 중상을. 현익철은 즉사한다. 왼쪽사진은 그동안 난무팅 유적으로 잘못 알려졌던 건물 전경.
독립지사들의 각종 회고록과 증언에는 치장에서 강변을 따라 이동녕, 조성환 등이 거주했고 인근에 임정청사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본보는 사실확인에 들어가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취재를 벌인 결과 정부조사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주민들이 하나 같이 임시정부 청사는 강가에 있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현재까지 치장 투오먼 임정청사 인근에서 살았다는 쩐(詹ㆍ여ㆍ73)씨는“양씨(애국지사 양우조로 추정됨) 성을 가진 부부가 2명의 딸들과 함께 살았었다”며“이동녕 총통(주석)의 거주지와 연이어 분명 비서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임정청사 앞의 길은 이전에 린장(臨江)가로 불렸는데 가게가 있고 강가에서는 수영을 했었다”며“당시 비서실은 철거돼 현재 아파트가 지어졌다”고 말해 임정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증언과 일치했다.
우한ㆍ창사ㆍ치장=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