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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정, 중일전쟁 나자 충칭으로…34개월 6000리 대장정 - 중앙일보 2019.01.16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01-23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년6개월가량 머물렀던 중국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충칭(重慶)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30분이면 도착한다. 하지만 중일전쟁 난리 통에 임정이 충칭까지 이동하는 데는 장장 34개월이나 걸렸다.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터지고 그해 12월 10일 일본이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을 공격해 사흘 만에 점령

하면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피란길에 올랐다.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을 거쳐 1938년 11월 충칭에

전시 수도를 세웠다.

임정도 생지옥 같은 난리 통에 국민당 정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이 싸운 전쟁의 불똥이 고스란히

임정에 튄 셈이었다. 임정이 창장(長江)의 하구인 난징 일대에서 37년 11월 피란길에 올라 창장의 중상류인 서부 내륙 충칭에

도착(40년 9월)할 때까지 걸린 기간은 무려 34개월이었다. “임정과 가족들이 충칭에 도착하기까지 이동한 거리는

육로로 3000리, 수로로 3000리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실로 목숨 건 대장정(大長征)이었다. 마오쩌둥의

홍군(紅軍)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이동한 대장정(370일간 9600㎞)보다 거리는 짧아도 고생한 기간은 길었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32년 4월 29일) 이후 줄곧 저장성 일대에 체류하는 동안 임정 요인들은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오가며 활동했다. 김구가 난징에서 숨어지낼 때 장제스를 면담해 지원을 얻어냈다. 필담으로 진행한

면담에서 김구는 “내가 100만원의 돈이 있다면 2년 이내에 조선·일본·만주 세 곳에서 대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했고,

장제스는 이후 자금을 지원해 군인을 양성했다.

 

임시헌법을 기초한 조소앙 선생의 기록을 보면 임정의 탈출 경로가 나온다. 35년 11월부터 1년가량 장쑤성 전장(鎭江)에

머물던 임정 요인과 가족 100명은 문서와 물품을 챙겨 37년 11월 26일 난징시 터우관(頭關)을 출발해 안후이(安徽)성

안칭(安慶) 등지를 거쳐 후베이성 한커우(漢口)로 이동해 12월 11일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 도착했다.

난징에서 창사까지는 목선을 타고 이동했다. 창장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은 기선이 목선을 끌어줘야 하는데 난리 통에

기선 선원들이 도망가버려 임정 식구들은 배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도 있었다. 이동 중 식량이 떨어지면 여름엔 겨울옷을 모아 팔고,

겨울엔 여름옷을 내다 팔아 양식을 마련했다.

 

정정화(1900~91) 여사는 임정의 안살림을 책임졌던 ‘임정 3인의 여걸’ 중 한 분이다. 김구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찬했던 정 여사가 쓴 『장강일기』를 보면 “돈도 떨어지고 팔 물건도 없었을 때 비상시에 쓰려고 간직했던 돈을

내놓자 임정 어른들이 처해하다 마지못해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사정이 어려웠다.

몇 년 전에 찾아갔던 창사에는 난무팅(楠木廳)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피란 중에 그곳에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 통합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권총 세 발을 쏘는 바람에 현익철이 숨지고

김구·유동열은 총을 맞았으나 가까스로 살았다. 일본군이 창사까지 거세게 공격하는 바람에 임정은 38년 7월 또 짐을

싸야 했다. 이후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광시(廣西) 좡족자치구 류저우(柳州) 등지를 전전했다.

 

중간에 일본군의 잦은 공중 폭격은 임정의 목숨을 위협했다. 특히 육로길 중에 가장 험하다는 구이저우(貴州)성

러우산관(婁山關) 굽잇길을 넘을 때의 상황은 아슬아슬했다. 국민당 정부가 내준 버스 여섯 대가 굽잇길을 돌 때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져 거꾸로 뒤집힌 차들을 보면서 운전사가 졸까 봐 옆에서 계속 깨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임정 일행이 40년 3월 13일 충칭의 관문이라는 쓰촨(四川)성 치장(?江)에 도착했을 때 애통한 일이 벌어졌다.

임정의 정신적 지주였던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동녕 선생이 누구인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 서간도로 망명해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 기관인 신흥(新興)

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교장을 지냈다. 1919년 1월 지린(吉林)성에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작성

작업에 김교헌·조소앙·조완구·김좌진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19년 2월 상하이로 건너가 임정 수립을 모색하다 4월 11일 동지들과 임정 수립을 선포했다. 40년 피란길에 타계할 때까지

임정 국무총리, 이승만 탄핵에 따른 대통령 대행, 의정원 의장, 국무령, 주석 등을 두루 역임했다. 충칭에서 차편으로 나를

안내해 준 중국 동포 이선자(李鮮子) 충칭 임정 기념관 전 부관장은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동녕 선생을 가장 존경했다’고

했는데, 말 그대로 이동녕 선생은 임정 가족에게는 ‘최고 어른’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충칭뿐 아니라 중국에 흩어져 있는 임정 사적지 자료 연구 전문가인 이 전 부관장은 “산성(山城)이란 별명처럼 충칭은 바위산으로

충칭 롄화츠(蓮花池) 38호에 있는 충칭 임정 구지(舊址·옛터) 진열관(陳烈館)은 경사가 급한 바위 절벽에 자리한 3층 건물이었다.

안내판에는 ‘1945년 1월부터 11월까지 사용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임정이 충칭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군의 공습 때문에 양류제(楊柳街)·스반제(石版街) 등지로 옮겨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한민국광복군총사령부 옛터를 찾아갔다. 4월 개관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동녕에 이어 임정 주석이 된 김구는

광복군창설위원장 자격으로 장제스 총통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40년 9월 17일 충칭

자링빈관(嘉陵賓館·호텔)의 광복군총사령부 창설 기념식에서 그는 “광복군은 한국과 중국이 합작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고 내외에 공표했다.


임정 식구들과 학도병들이 살던 투차오(土橋)마을 터는 세월이 흘러 밭으로 변해 어린 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그을린 돌무더기만이

옛날 이곳이 집터였음을 증언했다. 머지않아 이 일대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한다. 한국인으로는 우리 일행이 아마도 마지막 손님일

듯했다. 광복군사령부 건물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 허전한 마음을 메워 줄 수 있을까.

 

“27년 동안 면면히 이어온 임정의 정신은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상하이는 비밀활동 시기였고, 항저우는 혼란기였지만 임시 의정원이

정립하는 시기였고, 창사에서는 불행한 일도 겪었지만 충칭은 임정의 황금기였죠. 한국광복군도 창설했잖아요.” 허탈해하는

나를 이 전 부관장이 달래듯 말했다.


45년 8월 17일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들은 충칭에서 마지막 임시의정원 회의(제39회)를 했다.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임정 자격으로

환국하려 했으나 존 하지(1893~1963) 미군정청 사령관은 이들의 개인 자격을 고집했다. 김구는 상하이를 거쳐 임정 1진과 함께 11월 3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임정 루트’ 마지막 답사지인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 이선자 전 부관장은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어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일본·중국·미국·러시아 사이에서 굳건하게 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은

충칭까지 죽음을 무릅쓴 대장정을 감행한 임정 사람들이 그때 꿈꿨던 그 강한 나라로 충분히 변신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문영숙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독립운동가 최재형』『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등을 집필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문학동네 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293974